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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by 꿀꿀요정 2025. 4. 2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어: Napoléon Bonaparte, 코르시카어: Napoleone di Buonaparte, 이탈리아어: Napoleone Bonaparte, 독일어: Napoleon Bonaparte, 문화어: 나뽈레옹 보나빠르뜨,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흔히 나폴레옹(프랑스어: Napoléon, 문화어: 나뽈레옹)으로 불린다.

 

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의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공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된후 종신통령을 거쳐서 황제에 즉위했다. 그가 남긴 나폴레옹 법전은 전 세계의 민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군사적으로 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쳤고(클라우제비츠, 투하체프스키, 슐리펜 계획) 전술과 전략, 훈련, 조직, 군수, 의복과 포상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의 프랑스 육군은 효율적으로 조직된 군대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은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재학중에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프랑스 제1공화국 시절인 1793년에 툴롱 포위전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끈후 준장으로 진급하여 24살에 장군이 되었다. 1796년에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대성공을 거두는 등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강력한 반 프랑스 동맹군을 상대로 연승하면서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였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강대국들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국가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하게 해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했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대륙봉쇄령(1806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1]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야기된 물자부족과 생필품 부족은 유럽 민중들을 고통스럽게 하여 반나폴레옹 감정을 고조시켰다. 봉쇄령 위반을 응징하기 위해 시작한 이베리아 반도 점령 실패와 러시아 원정(1812년) 실패로 인해 프랑스 육군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손실을 입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후 대프랑스 동맹군이 1814년에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은 실각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떠났다.프랑스로 가면서 대규모 군중이 그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도중에 많은 병사가 합류했다.나폴레옹은 기념일을 존중하는 습관이 있었기에 3월 20일(나폴레옹 2세의 네 번째 생일이었다.)파리에 입성하길 원했고 당연하게도 그날 저녁 프랑스 황제로써 다시 튈르리궁에 들어갔다.같은 해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남대서양 외딴섬인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이탈리아 서쪽의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8명의 자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나폴레옹의 출생시 이름은 나브리오네 디 부오나파르테(이탈리아어: Nabulione di Buonaparte)였다. 이름을 나브리오네로 지은 것은 요절한 장남인 나브리오네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가문은 본래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하급 귀족 가문으로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했다.[3]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인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프랑스식 이름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Charles Marie Bonaparte)였으며, 어머니는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 보나파르트 가문은 조상대대로 법조인을 많이 배출한 법률가 가문으로 나폴레옹의 아버지도 피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4] 어머니의 출신 가문은 전통적으로 군인 집안이었다.[4]

 

나폴레옹이 태어날 당시 코르시카 섬는 격변기속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제노바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코르시카인들의 오랜 독립투쟁이 있었고 1755년 독립운동가 파올리가 섬의 대부분을 점령한후 코르시카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빛을 발하는 듯 했다. 이들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제노바는 1768년에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프랑스에게 통치권을 양도하였다.[5]

 

통치권 행사를 위해 프랑스가 코스시카를 침공하자 파올리의 지휘아래 코르시카인들은 무력으로 저항하였으나 1769년 5월 퐁트노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전세가 기울고 말았다.[6] 파올리는 프랑스가 제시한 항복조건을 수용한후[6] 영국으로 망명하였고[7] 독립투쟁에 참여하였던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는 임신 6개월 째인 아내를 두고 파울리를 따라 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아내의 배 속에 있던 아이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6]

 

새로운 총독이 프랑스에서 부임하고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 군인들이 마을에 상주하여 어수선한 8월 여름에 나폴레옹이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로는 프랑스측으로 전향하였으며 1771년 9월 13일 보나파르트 가문은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귀족에 봉한다는 특허장을 받고 귀족 자격을 얻었다.[7]

 

어머니 레티치아의 증언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아주 어릴 적부터 병적인 거짓말쟁이의 징후가 보였다고 한다.[8] 레티치아는 군인집안 출신답게 남성적인 성격에 원칙을 중시하고 규율에 엄격했기에 이런 나폴레옹에게 가차없이 매질을 하고 자주 꾸짖었다고 한다.

7살 쯤에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여 기본적인 읽고 쓰기, 셈법, 라틴어, 고대사를 배웠다. 9살 되던 해인 1778년 12월에 형 조제프와 함께 아버지 손에 이끌려 프랑스로 건너가서 오탱에 있는 수도원 부속 종교학교에 입학하였다.[9]

 

군사 학교 시절
오탱 종교학교에서 4개월간 프랑스어를 배운 후 형 조제프와 이별하고 1779년 5월에 브리엔 군사학교에 입학했다.[10][11] 브리엔 군사학교는 가난한 귀족 자제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곳으로 입학경쟁율이 높았지만, 당시 코르시카의 총독이었던 마르뵈프 백작의 특별한 도움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12] 1784년 10월에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나폴레옹은 4년 교육과정인 파리 육군사관 학교를 11개월만에 조기졸업하였다. 1785년 2월 24일 아버지 카를로가 위암으로 사망하여 수입이 끊기자 어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나폴레옹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일찍 직업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포병장교 임용시험을 준비한다.[13] 통상 시험준비를 2년정도는 하는 편인데 나폴레옹은 7개월 가량 준비한 끝에 1785년 9월 총 합격자 58명 중 42등으로 시험에 합격했다.

 

군인 시절

초임 장교시절
1785년 9월, 16세의 나이에 소위로 임관한 나폴레옹은 10월 28일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떠나 같은 해 11월 3일 발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라페르 연대에 포병장교로 부임했다.[14] 마송 도트브리브 대위의 포격 중대에 배치된 후 포병대 수습장교로서 10주간 기본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이수한 후 주어진 임무는 그다지 번거롭지 않았다. 병사관리, 수학, 포대 진지 구축, 화학, 물리학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15] 군복무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독서를 많이 했는데 주로 역사, 철학, 포병기술에 관한 책들을 많이 보았다. 퇴근후에는 소설을 습작하기도 했고 휴가를 받아 집을 떠나온 지 8년 만에 고향에 다녀오기도 했다.[16] 1788년에는 라페르 연대가 오손으로 주둔지를 옮기자 그곳에서 근무를 하였다. 급여의 대부분은 고향집에 송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여 허름한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등 여유가 없는 편이었다. 그의 초임 장교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거나 뛰어나지는 못했다.[16].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혁명이 발발하자 오손(Autun)에도 혼란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민란이 일어나 과세 대장을 불태우고 총괄징세청부업자의 사무실이 파괴되기도 했다. 8월에는 혁명 주도세력인 제헌의회에 의해 봉건제가 폐지되고[17] 인권선언이 발표되었다.[18] 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혁명사상이 널리 퍼지며 군대 내부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 바로 수습되기는 했으나 군기가 문란해져서 사병들이 장교를 농락하는 일도 벌어졌다.[19]

 

나폴레옹은 휴가를 얻어 9월말에 귀향하였고 사면받은 후 돌아온 파올리와 함께 혁명으로 어수선해진 코르시카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다. 피사대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있던 형 조제프를 지방의회 의원으로 당선시켰고 자신은 의용대의 부사령관이 되었다.[20][21] 혁명정부는 부족한 병력보강을 위해 지방의회의 의용군 모집과 현역장교가 의용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이중군적을 허용했기에[22] 나폴레옹의 활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된 것은 파올리가 나폴레옹을 탐탁히 않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나폴레옹의 지나친 아첨 그리고 과거 그의 부친이 프랑스 측으로 변절한 일로 인해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들을 기회주의 집단으로 판단했다.[23] 점차 둘 사이가 벌어지더니 1793년 1월에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24] 파올리는 극단적으로 흐르는 혁명을 비난하며 혐오감을 드러냈다.[25]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던 파올리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고려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국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던 바렌사건과 혁명전쟁중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사건들을 보며 혁명(자코뱅주의)을 지지했다.[25][26]

 

양측의 갈등은 프랑스 혁명정부가 추진한 사르데냐 원정에 나폴레옹이 참여하자 파올리가 교묘하게 방해하여 실패하면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났다.[27] 원정에 성공할 경우에 코르시카의 권력의 중심은 프랑스 혁명정부가 파견한 군대와 나폴레옹에게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혁명정부는 파올리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파리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보냈으나 파올리는 응하지 않았다. 나폴레옹과 파올리 간에 알력은 내전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28] 파올리가 주민들의 두터운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을 비롯한 반-파올리파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29] 1793년 5월, 파올리 측은 신속히 움직여 나폴레옹을 구금하고[30] 집과 농장을 약탈했다. 다행히 나폴레옹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코르시카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31]

 

무일푼 피난민이 되어 툴롱항에 도착했을 때의 프랑스는 집권한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해있었다. 보나파르트 가족은 귀족가문이었기에 위험할 수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남동생 뤼시앵이 자코뱅 클럽의 주요 일원이었기에 무탈할 수 있었다.[32] 그러나 자코뱅에 반발한 왕당파들이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툴롱도 왕당파가 장악하자 툴롱의 자코뱅파는 툴롱을 탈출하였다. 뤼시앵과 나폴레옹 가족들도 툴롱을 떠나 마르세유로 거처를 옮겼다. 나폴레옹은 니스에 있는 정규군에 복귀를 하여[33]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으나, 가족들은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는 등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32]

 

툴롱 포위전
루이 16세의 처형을 계기로 1793년에 대불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국왕이 없어도 국가통치가 가능하다는 '불온한' 혁명사상인 민주주의 사상이 자국민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했다. 이에 발맞추듯 왕당파가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혁명정부는 내우외환에 위기에 처한다. 프랑스 해군의 주요기지가 있는 툴롱을 장악한 왕당파는 반란 진압에 나선 혁명정부의 진압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8월 27일에 대불동맹인 영국과 스페인 해군을 끌어들여 혁명정부를 위협했다.[34]

 

툴롱항은 프랑스 해군의 중요 해군기지이며 지중해를 통제하는 데 핵심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혁명정부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1793년 9월, 정부군이 툴롱 탈환을 위해 투입되었으나 무능한 장군들로 인해 고전하였다. 대위시절 포병대 지휘관으로 참전한 나폴레옹이 전략상 최고의 요지이자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레기에트와 발라기에 요새 점령작전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5]

 

사령관이 두 차례나 바뀌면서 지리한 공방전만 3개월간 이어지다가 12월이 되어서야 나폴레옹의 작전에 대한 승인이 떨어졌다.[36] 48시간 동안 포격을 퍼붓고 나서 이어진 백병전 끝에 프랑스 군이 12월 18일 새벽에 레기에트와 발라기에 요새를 탈환하자 영국과 스페인 군은 황급히 철수하였다.[37] 두 곳의 요새는 툴롱 내항과 외항을 차단하는 위치에 있었고, 외부로부터 보급을 끊고 내항에 있는 적을 고립시킬수 있는 곳이었다.[38] 나폴레옹은 백병전 중에 허벅지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39] 군인으로서 최초로 무훈을 세웠다.[40] 툴롱 포위전 승리의 공적을 인정받은 그는 중령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하여 24세에 장군이 되었다.[41][42][43] 이는 3개월 만에 이루어진 고속 진급으로, 당시는 혁명을 반대한 귀족출신 장교들의 집단망명으로 유능한 지휘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임관이래 나폴레옹은 4년간 내륙지역에서만 근무했기 때문에 항구와 해안지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향 코르시카에서 4년간 활동하며 항구주변과 요새를 면밀히 연구했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국민공회에 제출하기도 했다.[44] 포병장교의 관점에서 주요 전략 요충지에 대한 파악, 상륙전이나 방어전에서 중요한 지형에 포병대 배치와 이용에 대한 관심과 노력의 경험은 툴롱항 포위전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만들었다. 운도 따랐다. 고향 아작시오와 툴롱의 지형이 놀랍도록 유사했던 것이다.[45]

 

왕당파 폭동 진압
무능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집권한 자코뱅파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46] 자코뱅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로베스피에르는 혼란한 국내외 시국 해결과 혁명 성과 보호를 구실 삼아 반혁명세력을 비롯하여 온건파와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내며 독재를 통해 혁명정부를 이끌었다. 이로 인해 1년여동안 파리에서만 30만명이 체포되고 약 15,000명이 처형당했다.[47] 《프레리알 22일 법》을 제정하여 공포정치를 강화하자 그 가혹함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이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의 반동 사건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 일당을 처형하였다.[48][49]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탱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와 몇몇 모함을 받아 8월에 투옥되었다.[50] 우여곡절 끝에 곧 석방되었으나 좌천성 발령에 항의하다가 무보직 상태로 파리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갔다.[51] 1795년 10월 5일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집권한 테르미도르파가 《3분의 2법》을 의결하자 의원선거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된 왕당파가 무장봉기했는데, 바라스 백작의 요청으로 폭동진압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무장한 2만명의 폭도들을 향해 산탄이 장전된 대포를 쏘는 전법으로[52] 신속하게 폭동을 진압하였다. 이일로 총재정부에 인정을 받게 되어 정보부와 파리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53]

 

이탈리아 원정
1796년, 바라스에 의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 이탈리아 원정을 20년 동안 펼쳐진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는 27세였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혁명파간의 이념 대립 등의 혼란 상태가 지속되어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에 1796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산맥을 넘으려 하였다. 몇 달에 걸쳐 산맥을 돌아서 넘은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였다.[54]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54] 이러한 군사적인 업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제 성냥을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집트 원정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54]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55] 비문해석은 1822년에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하게 해석되었다.[56][57] 이 비석은 영국군에 의해 1802년에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어있다.[58][59]

 

브뤼메르 쿠데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 8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고[60]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한다.[55] 이 승리로 영국 해군이 해당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프랑스 해군 전열함들이 전멸 당하고 두 척만 남게 되어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고립되고 만다. 한편 프랑스가 대불동맹군에게 연패하며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클레베르 장군에게 원정군을 맡기고,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55]

 

나폴레옹의 행위는 탈영에 해당되었으나 당시 총재정부는 이를 처벌할 힘이 없었고, 정국은 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55] 나폴레옹은 혁명정부의 권력자 시에예스와 함께 쿠데타를 공모한후,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다. 오백인회가 이를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61] 오백인회를 해산시킨후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1800년 2월 7일에 국민 투표에 부쳤다.[62] 찬성 300만 표, 반대 1,567표가 나와 통과되었다.[63] 물론 재산제한선거에 유권자수 약 700만명중 다수가 기권하였고 비밀투표가 아니었으며 투표결과는 내무장관이었던 루시앵에 의해 조작된 결과였다.[64]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로서 불과 30세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정부는 3명의 통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있었다.[65]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통령 시절

대불동맹 전쟁
제1대통령이 된 후에 나폴레옹은 대불동맹국에 강화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원정대를 이끌고 해발 2.469m에 달하는 알프스의 산베르나르 고개(Great St Bernard pass)[66]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부관들은 나폴레옹의 계획을 극구 만류했다. 과거 한니발이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은 이후에는 대규모 군사가 이 고개를 넘어간 역사가 없었으며 너무 험준한 협곡이라 군대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말하며 밀어 부쳤다.

 

1800년 5월에 프랑스 원정대는 험준한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었다.[67][68] 그리고 같은해 6월에 오스트리아 군대와 맞붙은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69][70] 마렝고 전투는 나폴레옹이 최고의 장군이라 인정한 루이 드제 장군이 가슴에 총탄을 맞고 전사한 전투이다.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수용하여 라인 강의 절반을 프랑스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양도했다. 이 강화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고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소 피트가 사망하자 1802년 3월 양국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69] 10년 만에 안정을 맞았다.

 

개혁 작업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혁명기에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의 회복을 실시하여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71]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했다.[71] 또,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다. 또 국내 법 정비에도 임하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72] 이것은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도 교육 및 교통망 정비에도 진력하였다.

 

대미 관계 개선
지난 수년간 프랑스는 미국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1793년에 1차 대불동맹 전쟁이 벌어진후 입장이 난처해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1794년)을 체결하며 동맹국인 프랑스를 배반했기 때문이다.[73] 대불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해상봉쇄하여 프랑스의 전쟁물자 조달을 방해했다. 1778년에 미국과 프랑스간에 체결된 통상동맹조약에 따라 미국에게는 프랑스와 공동방위에 나설 의무가 있었다.[74] 그러나 미국은 신생 독립국으로 아직 국가의 기초가 확고하지 않았고 군사력도 약한 상태에서 유럽의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74] 중립은 선언하였다.

 

그러나 영국으로서는 미국이 중립적 지위를 이용하여 프랑스와 교역을 할 경우 해상 봉쇄망에 빈틈이 생기는 만큼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영국은 미국을 자극하여 미국과 프랑스간에 동맹 관계를 분쇄하기 위해서 미국 상선 수백척을 나포 해버렸다.[73] 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이 다소 굴욕적인 '제이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자 동맹에게 배신당한 프랑스 총재정부는 외교적인 보복을 가했다.[75]

 

프랑스는 신임 공사의 부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관계개선을 위해서 미국이 파견한 대표단에게 1778년에 체결한 조약의 폐기를 전제로 막대한 금액의 차관과 뇌물을 요구하였다.[76] 이것이 일명 'XYZ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양국은 준 전시 상황으로 치달았다. 선전포고 행위가 없는 상태에서 양국의 해군은 해상에서 산발적으로 충돌하였으며(유사전쟁), 상대국의 상선을 포획하기도 하였다.

 

나폴레옹은 북미 루이지애나를 인수하여 새로운 프랑스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77]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티 반란을 진압해야 했는데, 원정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했다. 1800년에 미불 양국은 지난 1778년에 체결한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몰트퐁텐 조약(Treaty of Mortefontaine)을 통해 사태를 원만하게 마무리 지었다.[78]